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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어스베르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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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이어스베르다 전투는 1759년 9월 25일, 7년 전쟁 중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공자가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이다. 슐레지엔 탈환을 목표로 한 오스트리아와 이를 방어하려는 프로이센 간의 대립 속에서, 하인리히 공자는 기동전을 통해 오스트리아군의 허를 찌르고, 호이어스베르다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오스트리아군은 작센으로 후퇴하고, 러시아군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단독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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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어스베르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이름호이어스베르다 전투
관련 전쟁7년 전쟁
전쟁의 부분제3차 슐레지엔 전쟁
날짜1759년 9월 25일
장소작센 선제후국 호이어스베르다
결과프로이센의 승리
교전 세력1프로이센 왕국
교전 세력2합스부르크 군주국 (오스트리아)
지휘관1프로이센 공 하인리히
지휘관2베흘라 장군
병력 규모
프로이센불명
오스트리아3,000명
피해 규모
프로이센최소
오스트리아전사 600명, 포로 1,800명 (지휘관 포함 1,785명 투항)
관련 캠페인

2. 배경

1759년 9월, 슐레지엔 지방에서는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공작 휘하의 프로이센군과 폰 다운 원수 휘하의 오스트리아군, 프리드리히 대왕 휘하의 프로이센군, 그리고 표트르 살티코프 휘하의 러시아군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는 빠른 속도로 오데르강을 도하하여 러시아군으로부터 글로고브(그워구프)와 브로클라브(브로츠와프)를 방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투가 벌어지기 전 확보하려 했던 결정적인 지형적 요충지를 장악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폰 다운 원수는 쿠너스도르프 전투의 승리를 발판 삼아 프로이센에 결정타를 가하려 했으나, 작센에서 오스트리아군이 3분의 1 규모밖에 안 되는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폰 다운 원수는 군을 이끌고 괴를리츠로 향하였고, 북동쪽에 위치한 하인리히 공의 진영을 정찰하기 위해 고지대로 올라갔다. 폰 다운 원수는 다음날 아침인 9월 23일 하인리히 공의 진영을 공격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2. 1. 7년 전쟁과 슐레지엔

1759년 9월,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대왕과 하인리히 왕자,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폰 다운, 러시아의 표트르 살티코프 휘하의 여러 군대는 슐레지엔을 두고 서로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프로이센군은 오데르강을 신속하게 도하하여 러시아군으로부터 글로가우 (현재 그워구프)와 브레슬라우 (현재 브로츠와프)를 지켜냈지만, 지형적인 요인으로 인해 프리드리히는 공세로 나설 수 없었다. 한편, 다운은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작센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운은 군사적 우위를 잃을 것을 우려하여 괴를리츠로 군대를 전진시켰다. 하인리히 왕자의 야영지를 발견한 다운과 그의 군대는 그 근처 고지에 진을 치고, 9월 23일 새벽에 적의 야영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2. 2. 쿠너스도르프 전투와 작센에서의 패배

1759년 9월, 프로이센군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하인리히 왕자,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폰 다운,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살티코프 각 군단은 슐레지엔을 두고 서로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오데르강을 신속하게 도하한 프로이센군은 러시아군으로부터 그워구프브로츠와프의 도시를 지켜냈지만, 지세적인 요인으로 인해 프리드리히는 공세로 나설 수 없었다. 그 사이 다운은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얻은 대승을 활용하려 했지만, 작센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이 그 3분의 1 규모의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운은 현재의 군사적 우위를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괴를리츠로 군대를 전진시켰다. 하인리히 왕자의 야영지를 발견하자, 다운과 그의 군대는 그 근처의 고지에 진을 치고, 다음 9월 23일 새벽에 적의 야영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3. 하인리히 공의 기동전

1759년 9월, 하인리히 공 휘하의 프로이센군과 폰 다운 원수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은 슐레지엔 지방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데르강 도하에 성공하여 글로가우와 브레슬라우를 방어했지만, 결정적인 지형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폰 다운 원수는 쿤스도르프 전투의 승세를 몰아 프로이센에 타격을 주고자 괴를리츠로 이동하여 하인리히 공의 진영을 정찰하고, 9월 23일에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하인리히 공은 이미 철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9월 22일 밤, 프로이센군은 폰 다운 원수를 속이기 위해 모닥불을 피우고 소란을 일으키는 허수아비를 남겨둔 채 조용히 진영을 떠났다. 프로이센군은 먼저 로텐부르크에서 3시간 동안 휴식을 취했다. 그 사이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의 빈 진영을 점령했다.

3. 1. 폰 다운의 오판

하인리히 공이 이 지역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 폰 다운 원수 휘하의 정찰병은 프로이센군의 물자가 북동쪽 글로가우를 향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폰 다운 원수는 이를 프로이센군의 함정으로 의심하여 바우젠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실제 하인리히 공의 프로이센군은 로덴부르크를 떠나 서쪽으로 18마일 떨어진 클리텐으로 이동했다. 이후 3시간 휴식을 취하고 20마일을 행군하여 호이어스베르다 지역으로 향했다.

이는 폰 다운 원수가 하인리히 공의 의도를 오판하게 된 과정이다. 폰 다운은 며칠 전 베흘라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동쪽 측면의 위협은 없을 것이라고 알린 바 있다.

3. 2. 50시간의 강행군

9월 22일 밤, 하인리히 공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의 폰 다운 원수를 속이기 위해 모닥불을 피우고 소란을 일으키는 허수아비를 남겨둔 채 조용히 진영을 떠났다. 프로이센군은 먼저 로텐부르크에서 3시간 동안 휴식을 취했다. 그 사이, 남쪽으로 약 32.19km 떨어진 곳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의 빈 진영을 장악했다.

폰 다운 원수의 정찰병은 프로이센군의 물자가 북동쪽의 글로가우를 향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폰 다운은 함정을 의심하여 바우첸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실제 하인리히 공의 프로이센군은 로텐부르크를 떠나 서쪽으로 약 28.97km 떨어진 클리텐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다시 3시간 동안 휴식을 취한 후, 프로이센군은 호이어스베르다 지역으로 약 32.19km를 강행군했다. 호이어스베르다에는 베흘라 장군이 지휘하는 3,000명의 황제군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프로이센군의 접근을 모르고 있었다.

베흘라 장군은 드레스덴 공방전에서 용맹을 떨친 인물이었다. 그는 작센과 실레지아의 프로이센군이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선의 일부로 호이어스베르다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당시 프리드리히 대왕은 러시아군을 견제하며 퇴각전을 벌이고 있었고, 하인리히 공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프리드리히 대왕과 합류하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작센과 슐레지엔의 프로이센군이 합류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실제로 폰 다운 원수는 며칠 전 베흘라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동쪽 측면의 위협은 없을 것이라고 알렸다.

4. 호이어스베르다 전투

스위스 출신 렌툴루스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선봉대가 숲에서 갑자기 나타나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했다. 베흘라 장군은 크로아티아 연대와 포병대를 모아 대응하려 했으나, 프로이센군의 포격에 부대가 무너졌다. 짧은 전투 끝에 베흘라 장군을 포함한 많은 오스트리아군이 포로로 잡혔다.

폰 다우 원수는 희망을 잃고 서쪽 작센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유지하려 했고, 러시아군이 홀로 프리드리히 대왕을 상대하게 되었다.

토마스 칼리는 이 전투를 통해 하인리히 공이 폰 다우 원수를 놀라게 하고 그의 작전을 무너뜨려 1759년 전역을 최악의 상황에서 진행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브란덴부르크의 기적의 원인이 되었던 오스트리아군과의 협정이 파기된 것에 분개한 러시아군은 살티코프가 군대를 수습하여 귀국해 버렸다.

4. 1. 렌툴루스 장군의 역할

스위스 출신 렌툴루스(Lentulus) 장군이 지휘하던 프로이센군 전위대가 숲 속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다. 베흘라 장군은 크로아티아 연대와 포병대를 집결시켰으나 그 순간 프로이센군의 포병대가 크로아티아 부대를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수분 동안 오스트리아군은 격전을 벌였으나 베흘라 장군은 프로이센군에게 잡혔고, 600명이 전사하였다.

토마스 칼리는 프로이센군의 야간 진군을 통해 하인리히 공이 다운 원수를 놀라게 하고 그의 작전을 무너트려 1759년의 전역을 최악의 상태에서 진행하게 하였다고 평가하였다.

4. 2. 베흘라 장군의 패배

스위스 출신 장군 렌툴루스(Lentulus)가 지휘하던 프로이센군 전위대가 숲 속에서 쏟아져 나오자 오스트리아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 베흘라 장군은 크로아티아 연대와 포병대를 집결시켰으나 프로이센군의 포격이 크로아티아 부대를 덮쳤다. 수분 동안 격전이 벌어졌지만 베흘라 장군은 프로이센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600명이 전사했다. 폰 다운 원수는 희망이 무너지자 서쪽 작센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전열을 유지하려 했고, 러시아군 혼자 프리드리히를 상대하도록 남겨두었다.

토마스 칼리은 "프로이센군의 야간 진군은 아마 하인리히 공의 가장 현명한 업적이며...이를 통해 이제까지 다른 이들이 다운 원수를 놀라게 했던 것보다 더 다운 원수를 놀라게 하였다. 다운 원수의 프로이센군을 최대한 잡아놓아 전력을 약화시키려는 작전은 하인리히 공의 움직임에 의해 완벽히 무너져 버렸고, 한 번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사실상 다운 원수는 상황이 완전히 바뀐 최악의 상태에서 1759년의 전역을 진행하여야만 했다."라고 평가했다.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스위스 출신 렌툴루스 장군이 이끌던 프로이센군 선봉대가 숲에서 나오자 오스트리아군은 충격을 받았다. 베흘라 장군은 크로아티아 연대와 포병대를 집결시켰으나, 프로이센군의 포격에 600명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격퇴당했으며, 베흘라 장군도 포로로 잡혔다.

폰 다운 원수는 작센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유지하려 했고, 프리드리히와 대치하던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군과의 협정이 파기된 것에 분개하여 군대를 수습해 귀국했다.

5. 1. 전략적, 전술적 의의

토머스 칼라일은 저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역사(1858)에서 프로이센군의 야간 행군을 "아마도 하인리히 공의 가장 영리한 솜씨"라고 평가하며, "이 마지막 완벽한 작전으로 그는 다우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놀라게 했고, 그의 정교한 지연 전술을 단번에 파멸과 붕괴로 몰아넣었으며, 결과적으로 올해의 캠페인을 망쳤다."라고 썼다. 하인리히 공의 기동성과 전략적 판단은 다운 원수의 작전을 무너뜨리고 프로이센군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소규모 병력으로도 우위를 점한 프로이센군의 전술적 특징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는 호이어스베르다 전투의 결과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5. 2. 7년 전쟁에 미친 영향

스위스 출신 지휘관 렌툴루스가 이끈 프로이센군 선봉대는 숲에서 나와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했다. 오스트리아군 지휘관 베라는 크로아티아 병단을 배치하고 대포를 발사했지만, 프로이센군의 포격에 대열이 무너졌다. 짧은 전투 후 베라를 포함한 생존자 대부분이 포로로 잡혔다.

실의에 빠진 다우는 군대를 작센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한편, 브란덴부르크의 기적으로 인해 프리드리히와 계속 대치하던 러시아군은, 구벤에서 맺었던 오스트리아군과의 협정이 파기된 것에 분개했다. 곧 살티코프는 군대를 수습하여 귀국했다.

5. 3. 역사적 평가

토머스 칼라일은 자신의 저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역사(1858)에서 프로이센군의 야간 행군에 대해 "아마도 하인리히 공의 가장 영리한 솜씨일 것이다... 이 마지막 완벽한 작전으로 그는 다우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놀라게 했고, 그의 정교한 지연 전술을 단번에 파멸과 붕괴로 몰아넣었으며, 결과적으로 올해의 캠페인을 망쳤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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